본문 바로가기
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3_3 역사를 통한 평화 만들기_강화 평화마을 이야기

by 어린이어깨동무 2023. 2. 16.

[기억과 평화] 

강화 평화마을 이야기

 

역사를 통한 평화 만들기

 

 

강화지역 민간인학살과 갈등문화 확대

 


한국전쟁 당시 강화에서는 최소 1천 명 이상의 주민들이 세 차례에 걸쳐 집단 희생되었다. 첫 번째로 인민군 후퇴 시기인 195010월 초, 70명의 주민들이 내무서원(사회안전원) 등에 체포되어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인화성과 개성 송악산 등지로 이송되어 학살되었다. 내무서(사회안전기관)는 각 면의 분주소와 민간인 치안대가 체포한 약 3백 명의 주민들을 강화읍 산업조합 등지에 구금한 후 이들 중 일부를 인화성 등지로 이송한 후 학살한 것이다.

 

두 번째, 10월 초부터 12월까지 부역혐의로 경찰과 민간인 자치치안대에 의해 체포된 주민 수백 명이 강화읍 경찰서, 각 면 지서 등지에 구금되었다가 이 중 3백여 명이 인천으로 이송된 후 학살되었다. 인천으로 이송된 주민들은 학익형무소, 인천경찰서 등지에 구금되어 있다가 인천 주재 군검경합동수사본부(대장 대위 김○○)의 지휘명령에 따라 분류심사를 받았다. 분류심사 후 고등군법회의에 넘겨졌는데, 이 중 140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학익형무소 교도관 홍OO은 이들 140여명을 비롯한 7백여 명에 대한 재판이 5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건 재판도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민간인들은 인천 앞바다에서 학살되거나 1.4후퇴 당시 마산 등지로 이송, 헌병대에 인계된 후 학살되었다.

 

세 번째, 1.4후퇴 당시인 195012월 말부터 이듬해 2월 초까지 약 1천여 명의 주민들이 교동해군특공대와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게 집단 희생되었다. 희생자의 절대다수는 수복 직후 부역혐의자 가족이거나, 전쟁을 피해 연백개풍 등지로 피난 갔던 주민과 그 가족들이었다. 가해자들은 강화군에서 후퇴하는 군경으로부터 받은 소총 등으로 무장하였고, 수복 후 작성된 부역자 조서의 명단을 인계받았다. 이들은 해군 및 미군과 함께 후방지역 유격전을 전개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도, 교동도를 비롯한 강화지역을 안전지대로 만들려 했고, 이 과정에서 어린 아기를 비롯한 부역혐의자 가족과 월북피난자 가족들이 멸족을 당했다.

 

이처럼 강화지역 민간인학살의 가해자는 치안 당국(내무서, 경찰서, 군검경합동수사본부)과 민간단체(치안대, 자치치안대, 특공대)가 결합한 형태였다. 강화지역 학살이 남과 북의 치안 당국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문제는 이들이 학살의 모든 과정에 현지 민간인들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주민 간의 갈등이 증폭하면서 1.4후퇴를 전후로 최소 1천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특히 교동해군특공대와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영아부터 70대 노파에 이르기까지 아무 혐의도 없는 사람들을 부역혐의자와 월북피난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이 사건은 강화주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로 인해 주민 간의 갈등과 불신이 증폭되었고, 외부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인식이 확대되었다.

 

정전 이후에도 갈등의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교동을 비롯한 강화 북쪽 지역은 휴전선과 맞닿은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때문에 강화읍과 교동면에는 보안대가 설치되어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970년 월북자 가족이 강화읍 주둔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교동면 월북자 가족이 대룡리 소재 보안대에게 사찰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미법도 주민들이 다섯 차례 간첩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반공 이념을 강화했고, 한국전쟁 중에 학살로 증폭된 갈등과 불신이 사라지기는커녕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개인과 집단에 대한 적대의식으로 확대되었다.

 

교동도 북쪽의 철조망

 

화도면 평화마을의 상생문화

 

이러한 민간인 집단 학살은 강화군의 13개 읍면 중 12개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이중 화도면은 다른 지역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인민군 점령기에 2, 수복 직후 몇 명이 내무서원과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1.4후퇴 당시 강화특공대 화도면 지대(민간단체)에 의해 희생된 주민이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강화지역에서는 이 시기에 많은 주민들이 처참하게 희생되었지만 화도면에서는 달랐던 것이다. 이 곳에도 다른 지역과 같이 서로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지만, 희생이 눈에 띄게 적었다. 이와 관련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 기록과 지역 주민의 증언을 살펴보자.

(1)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1.4후퇴를 전후해 430여 명 이상의 주민들이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학살되었고, 같은 시기 교동지역에서는 20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되었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된 사건만을 조사할 수 있기 때문에 조사범위가 강화읍, 길상면, 삼산면의 일부지역과 교동면에 한정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강화에서 희생된 주민은 발표한 630명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좌익성향의 김재만이 9・28수복 후 개풍으로 피신하였다가 가족의 생사를 염려하여 1·4후퇴 시 화도로 왔었는데 가족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윤성근(화도면 특공대장)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화도면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좌익성향의 김재만과 우익성 향의 윤성근이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서로 사상은 달랐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잘 듣고 존중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강화군의 다른 면에서도 인민군이 재침 시 부역할 것이라는 예단을 갖고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일이었음….
- <강화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59-60 -

 

“윤성근은 화도면 우익 우두머리이고, 김재만 은 좌익의 우두머리였어요. 두 사람이 합의를 했지. 주민들 서로 다치게 하지 말자고.”
- 주민 주○○ -

2) 지역 주민들은 ‘이재만’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본 원고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 기록에 준해 ‘김재만’으로 표기한다

 

인민군 점령 시기에 희생된 주민들은 김재만과 윤성근의 영향력 밖에 있었다. 남북한 치안 당국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그러나 인민군점령기와 수복 후 화도면 지서 유치장과 창고 등에 체포되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생존했다. 특히 강화특공대 화도면 지대는 이들이 화도면의 치안을 담당할 때 마을 주민들을 한 명도 학살하지 않았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읍면 지대가 치안을 담당할 때 가장 많은 주민들이 학살된 것과 대조적이다.

 

이같은 대조적인 현상은 학살 시기 이후, 정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당시 김재만과 같이 좌익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의 가족, 혹은 월북자의 가족들 대부분이 1.4후퇴 당시 강화향토방위특공대와 교동해군특공대에게 학살되었지만, 김재만의 조카는 생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

 

“보복은 없었어요. 삼촌(특공대 부대장)도 그렇고 우리 집안은 성공회를 다녔는데, 교인 중에 하나가 인민위원장이었어요. 그 사람도 수복 후에 다치지 않고 생존했어요. 우리 앞집 사람도 삼촌이 보복하지 않아서 잘 살았어요. 전쟁 끝난 후에도 주민들 간에 갈등은 없었어요. 서로 죽고 죽인 것이 있어야 갈등도 있는 거지, 죽고 죽인 일이 없었는데 갈등할 게 있나요? 그건 제가 조합장을 해서 잘 알아요.”
- 화도면 조합장을 지낸 김OO(특공대 부대장 조카) -

 

이러한 상생문화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70년 전후에 월북자의 동생이 이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원조회에 걸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안대는 가족 중에 월북자가 있었던 주씨 할아버지의 큰형을 보안대로 끌고 가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월북한 가족이 있다는 것이 유일한 혐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주민들은 주씨 할아버지를 이장으로 추대한 것이다. 주민들은 이념으로 주씨 할아버지를 정죄하거나 갈등 관계를 형성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이웃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화도면 내리 주민들의 마을문화였다.

 

이러한 일상적 평화는 내리를 비롯한 화도면 주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의 산물이었다. 서로 죽고 죽여야만 생존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서로의 생명을 살리는 과정에서 평화가 주어진 것이다. 이는 이념과 신념에 따라 집단을 형성하고, 내가 속한 집단의 생존과 번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 건너편에서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념과 체제가 아니라, 상생이 먼저라는 것을 확인해준 화도면 주민들의 문화는 오늘날 갈등으로 가득한 한국 사회와 적대의식으로 가득한 남과 북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역사를 통한 평화 만들기ㅣ현대사를 공부하는 강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굴곡진 현대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발굴하고,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치유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 인터뷰

 

강화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생존의 문제가 치열했다. 좌우익의 이념과 상관없이 밥을 해줬다는 이유 등으로 같은 마을에서 손가락질 하나로 어린아이, 여성, 노인까지 학살되었다. 지금도 그로 인해 같이 농사짓지 않으며, 갈등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가족 간의 관계, 트라우마, 사회적 시선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10명 중 9명이라 할 정도로 많다. 당시의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장◯◯님(피해자 고◯◯님 따님)

아버지는 굉장히 보수적이셨어요. 독재정권 시대였으니까요. 오랫동안 어머니는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셨지요. 조부모님과 삼촌이 전쟁 때 돌아가셨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2005년 무렵 과거사위원회에서 종이 한 장을 들고 오셔서 도움을 요청하셨을 때 깜짝 놀랐어요. 상상도 못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계셔서, 세상이 바뀌어서, 자신의 얘기를 건넬 수 있는 자식이 있어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평소 다
리가 아픈 어머니인데 이 일만큼은 힘들다 안하시고 날개를 단 것처럼 행복해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가족 모두가 같은 상황은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일찍 고향 강화를 떴지만 두 이모들은 강화에 살고, 큰 이모부는 북에서 월남한 분이고. 이모님들의 입장이 한편으로 이해되기도 했어요. 아직도 이런 이야기 꺼내기가 어려운 상황이구나 생각했지요.

이모들은 더 커서 경험했기 때문에 그 공포가 더 컸을 것도 같아요. 사람들이(우익쪽) 행방불명인 외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구들장, 천정을 쑤시고 그랬다던데... 그걸 보며 철이 더 들었던 이모들은 더 공포스러웠을 거 같아요. 순간순간 살면서 꿈에 나타나고 떠오르는 고통도 컸을 거 같아요. 독일의 나치즘 연구에서 과거의 고통이나 기억들이 언어, 행동, 태도 등의 문화 속에 스며들어 3대를 이어 간다고 해요. 어머니는 평생을 피해의식,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삶을 사셨던 거 같아요. 타인을 의식하는 삶이 몸에 배어있었어요. 우리를 키우면서도 항상 남한테 손가락질 받으면 안된다, 피해를 주면 안된다, 반듯해야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저한테도 그런 성향이 많이 있는 거 같아요. 구체적인 일을 겪을 겪은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 개인의 삶이 어떻게 왜곡되어 연결되는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거 같아요.

그런 아픈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진상이 규명되면 좋겠어요. 그리고 당사자들의 개인적인 상황, 아픔을 제대로 끄집어 낼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잘못된 일들이 미래에 되풀이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전쟁으로 인해 우리 외할머니, 외삼촌이 적법한 절차도 없이 돌아가셨던 것처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보여지듯 전쟁은 특히 여성, 아이들에게 더 가혹한 거 같아요. 그래서 분단 상황에서 서로 자극하지 않기를, 상대방을 탓하기 전 에 우리부터 적대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면 좋겠어요.

 

최◯◯님(한국전쟁 민간인 피학살자 강화유족회 회장)

어머니가 24살, 동생이 두 살 때 일이었어요. 6명의 가족(아버지, 어머니, 동생, 막내 삼촌 내외, 고모)이 그 때 모두 돌아가셨죠. 당시 두세 살 아기들도 3명이 죽었어요. 나는 할머니가 술과 닭을 잡아다 주고 빼내셨다고 하더라고요. 법과 원칙이 없이 삶과 죽음이 그렇게 결정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1952년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10살이던 무렵,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와 고모를 데려다가 메다꽂기도 했었어요. 1965년, 저 열아홉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교동에서 완전히 떠나게 되었어요.

그러다 다시 교동 민간인 학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90년대 중반 무렵 성묘하러 배를 타고 교동에 들어갔을 때 본 안내문이었어요.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예를 회복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신청을 하게 되었죠. 지금도 교동의 많은 사람들은 그때의 일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나는 사람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일을 합니다. 사람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거니까요.

저는 살면서 내내 이 일로 고통받으면서 살았어요. 연좌제로 최전방이 아닌 교육 사단에서 군복무를 했고, 월남전에 지원했으나 받아 주지 않았고, 서른살에 사우디 건설 현장에 기중기 기사로 합격했는데 사상이 문제가 되어 못갔습니다. 좌익으로 낙인찍혀서 자신감이 없어지고 여러 사람이 있으면 떨리고 가슴이 울렁거려서 병원에 갔더니 우울증이래요. 내성도 생기고 유족회 활동을 통해 표현하면서 지금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지만 계속 마음에 담고만 있었으면 병 걸렸을 거에요.

지금도 전쟁 때 민간인 학살로 돌아가신 분들 이야기를 이상한 색깔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요. 2015년 무렵 다니던 교회에서 간증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알게되었죠. 사람들에게 내가 전쟁 때 겪은 얘기를 하는 건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요. 모두가 진실을 튕겨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말을 할수록 바보가 되고 있다고 느껴졌구요. 사람들이 우리가 전쟁 때 겪은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면 좋겠어요. 사회문제가 발생했을 때 좌우 편가르기하는 모습을 보면 전쟁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전쟁 당시의 진실이 밝혀져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통일이 되어서 전쟁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구요.

강화평화대에서 바라본 북녘

 


그들도 그냥 나와 같은 사람일 뿐

타래 꿈틀리인생학교


어른들은 학교가 작은 사회라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는 종종 사회의 쓴맛을 미리 보게 될 때가 있다. 교실에는 좋은 애만큼 이상한 애도 많고, 또 이상한 애들이 이상하게 인기도 많다. 못된 말을 서슴없이 해도 웃어주는 사람이 늘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반대로 소외된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아이는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그 친구는 애들이랑 성격이 안 맞는 건지, 치는 농담마다 재미가 없는 건지, 무엇 때문에 밉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인터넷 세상은 학교보다 조금 더 큰 사회다. 그곳엔 이상한 사람이 좋은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은 것 같다. 그 어디에서보다 남에게 관심이 많아진 사람들이, 그 어디에서보다 남을 살피지 않게 되는 곳이 인터넷이기 때문에. 마주 보지 않고 대화하는 것쯤은 이제 일상이라서 우린 서로를 쉽게 아프게 하곤 한다. 언제든 나도 겪을 수 있는 일들이 너무 쉽게 남의 일이 되고, 누구나 한 번쯤 할 법한 말실수를 한 사람이 인터넷에 코빼기라도 비췄다간 천하의 '인간쓰레기'가 되는 게 요즘 사회다. 그렇게 매정한 사회 속에서 폭력에 가담하지 않으려면 생각보다 큰 힘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화도면을 떠올리곤 한다. 정확히는 화도면에 대해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화도면은 남한의 서쪽 위 끄트머리 섬인 강화도의 한 면이다. 몇천 명 남짓의 작은 사회. 이곳에도 1950년 6월 25일 예고없이, 예외없이 전쟁이 찾아왔다. 그리고 전쟁보다 더 무서운 의심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며, 처음에는 인민군이 이곳을 점령했고, 얼마 후 우리 군이 이 곳을 수복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인민군 점령기에 북한에 협력한 ‘부역자’를 색출해야 했다. 옆집 친절한 박씨가 부역자일 수도 있었고 앞집 똑똑한 김 청년이 부역자일 수도 있었다. 이 때 대다수의 마을에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박씨와 김 청년을 부역 혐의자로 몰아 죽이는 걸 택했다. 전쟁은 사람을 자기 목숨밖에 모르도록 궁지로 몰아넣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왜였을까? 화도면만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상해 보았다. 내가 화도면의 주민이었다면, 나는 왜 평화를 행했을까. 왜 나는 옆집 이웃이 부역자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을 심판하여 내가 안전해지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부역자라는 단어가 참 웃기지 않나 싶다. 누군가를 도우려 했을 뿐인데 무엇이 그렇게 큰 죄였을까. 또한 실제 부역자는 아주 소수였고, 더 많은 사람들은 그저 ‘혐의자’였다. 부역 혐의자라는 껍데기를 벗겨내고 나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평범하디 평범한 주민일 뿐이었다. 그 생각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북측에 동의하는 자들은 모조리 적으로 묶어 바라봤다. 간단하고 쉬운 흑백논리지만, 거기서 벗어나야 비로소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화도면 사람들이 평화를 지킬 수 있었던 건 '그들도 그냥 나와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 덕분이었을 것 같다.

또 하나. 평화의 첫걸음이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면, 그 다음은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정함의 힘을 믿는다. 전쟁 속에서 다정하다는 말은 조금 가볍게 느껴질 수 있지만 원래 다정함은 단단한 결심 없이는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분명 화도면에서도 누군가가 큰 맘 먹고 시작해냈을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따뜻한 관심의 굴레를. 어쩌면 마을의 남측과 북측을 각각 이끌었던 윤성근과 김재만의 협상이 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다정함은 마을 주민들의 안위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었다. 당연한 책임도 당연하지 않게 만드는 전쟁통 속에서, 지도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껏 늘 관심은 여유가 있을 때 베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유가 없는 와중에 주는 따뜻한 눈길의 틈이 오히려 모두에게 여유를 이끌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좀처럼 여유가 부족한 요즘 꼭 필요한 가치는 다정함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그러지? 자기 목숨이 걸려있잖아. 나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건 사실이잖아. 어떻게 마음을 열어? 화도면의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목숨을 건 용기를 내어 이웃 주민들을 모두 포용했는지는 아직도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대의 우리에겐 훨씬 쉽다. 우리는 목숨 같은 건 걸 필요가 없다. 목숨이라도 걸려있는 듯 매정하게 서로를 대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바라볼 것은 같은 반 친구의 땡그란 눈, 지하철에서 옆자리 앉은 사람의 가방에 달린 열쇠고리, 댓글 창 화면 너머의 동생뻘 어린아이, 그런 것들이다. 찬찬히 바라보다 보면 그들이 더이상 '남'이 아닌 '우리'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그리고 기억할 것은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는 것. 다정함으로 얻은 여유는 무척 달콤하다고 한다. 그들에게 다정한 것은, 나에게도 다정한 것이다.

 

꿈틀리인생학교 타래ㅣ강화도의 풀과 바람을 마음껏 즐기다 어느덧 애정도 싹튼 서울토박이 청소년입니다. 
그곳에서 좋은 스승들을 만나서 이렇게 새 배움도 얻을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세상을 향해 귀를 쫑긋 열고, 저만의 방식으로 해야 할 이야기들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댓글